인류세 담론과 我相
김승국(평화 연구⋅활동가)
인류세 담론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창세기 1장 28절의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베푸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 하셨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이 인류세와 관련이 있다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여기에서 “땅을 정복하라”는 것이 중요한데, 이렇게 땅을 정복의 대상으로 보는 관점으로부터 인류세가 비롯되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이러한 주장과 달리 天地人(천지인)의 조화를 중시하는 동양의 주역 사상에 바탕을 둔 인간과 자연의 상생이라는 사고방식에서는 인류세라는 왜곡된 세계관이 나오기 어렵습니다. 『列子(열자)』의 「天瑞(천서)」편에 ‘盜陰陽之和(도음양지화)’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내 몸은, 음양 조화의 氣(기)를 도둑질한 것이다’라는 뜻으로 상당히 중요한 담론입니다.
불교 쪽에서 『金剛經(금강경)』에 ‘我相(아상)⋅人相(인상)⋅衆生相⋅壽者相(수자상)’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중에서 我相이라는 말씀 속에 인류세와 관련되는 부분이 있어서, 틱낫한 스님이 금강경을 해설하신 책을 아래와 같이 인용하여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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我相
“왜냐하면 수보리야! 보살이 我相(아상), 人相(인상), 衆生相(중생상), 혹은 壽者相(수자상)에 집착한다면, 그는 진정한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른손은 단지 돌보기만 할 뿐, 스스로를 왼손과 구별하지 않기에 진정한 보살입니다. 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이란 말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我相은 自我(자아)에 대한 개념으로 영원하고 불변하는 실체를 말합니다. 하지만 불교에서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흔히 자아라고 일컫는 것은 모두 無我(무아)의 요소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사실상 자아라고 불릴만한 실체는 없는 것입니다. ‘자아’ 라는 개념은 ‘자아가 아닌 것’이라는 개념을 가질 때 생겨납니다. 우리는 개념화라는 칼로 실체를 조각낸 뒤, 한 부분만을 ‘나’라고 부르고, 나머지는 ‘내가 아닌 것’이라고 부릅니다.
人相은 인간에 대한 개념입니다. 我相이 無我의 요소들로 이루어진 것과 마찬가지로, 人相은 태양이나 구름, 밀가루, 공간 등과 같은 인간이 아닌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러한 요소들 덕분에 우리가 인간이라고 부르는 어떤 것이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인간’과 ‘인간이 아닌 것’을 구별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주는 인류를 만들었고, 동물이나 식물, 달과 별 등은 인류를 위해서 존재한다.”라고 말한다면, 이는 人相이라는 개념에 집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개념에 갇히면 흔히 자아와 無我를 구별하고, 인간과 인간이 아닌 것을 구분하게 되는데 이는 큰 잘못입니다.
우리는 좀더 편리한 삶을 위해 첨단기술의 발전에 많은 공을 들이고 있으며, 그러기 위해 숲이나 강, 바다와 같은 인간이 아닌 요소들을 훼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연을 파괴하고 오염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우리 자신을 파괴하고 오염하는 것입니다. 인간과 비인간을 차별한 결과, 지구에는 온난화 현상과 각종 오염, 여러 질병이 생겨났습니다. 우리 인간이 스스로를 보호하자고 한다면 먼저 인간이 아닌 요소들을 보호해야 합니다. 지구와 인류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러한 근본적인 이해가 필요합니다.
衆生相은 生物(생물)에 대한 개념으로, 생물과 무생물을 분리하는 순간 생겨납니다. 프랑스의 시인 라마르틴(Lamartine)은 생물에 대한 우리의 보편적인 견해에 맞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무생물이여, 그대에게 영혼이 있는가?”
무생물이 있기에 생물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만일 무생물을 없앤다면 생물 또한 사라질 것입니다. 사찰에서 수계의식을 하는 동안 비구와 비구니들은 다음과 같은 서원을 합니다.
“나는 살아 있는 중생과 살아 있지 않은 중생 모두를 해탈케 하기 위해 온 마음으로 수행할 것을 맹세합니다.”
이외에도 여러 의식을 통해 부모와 스승, 친구, 동물, 식물, 광물 등 수많은 중생에게 깊은 감사를 표합니다. 이렇게 행함으로써 생물과 무생물 사이에 차이가 없음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또, 베트남의 한 작가는 그의 작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조약돌이 헤어짐의 고통을 받지 않는다고 어떻게 단정할 수 있습니까? 내일이면 그들은 서로를 필요로 할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을 이해하게 될 때, 우리의 사랑은 생명이 있는 것과 없는 것 모두를 포용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壽命(수명)을, 태어나는 순간 시작되어 죽을 때 끝이 나는 일정한 길이의 개념으로 생각합니다. 그 이전이나 이후를 포함하지 않고, 오로지 생명이 지속되는 동안만 살아 있는 거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 동안은 우리의 모든 것이 죽음이 아니라 삶의 영향 아래에 놓여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한번 개념화라는 이름의 칼이 실체를 조각내어 한 쪽을 삶으므, 다른 쪽은 죽음으로 갈라놓는 것입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삶이 시작되고 죽는 순간 그것이 끝난다는 생각은 잘못된 견해입니다. 이는 수명에 대한 견해인 壽者相(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반야바라밀의 지혜에 따르는 삶과 죽음의 하나입니다. 우리는 매 순간 태어나고 매 순간 죽습니다. 하나의 수명 속에는 무수히 많은 삶과 죽음이 있습니다. <탁낫한 지음, 양미성 외 옮김 『틱낫한 스님의 금강경』 (서울, 장경각, 2004) 54~5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