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228 역사문화탐방이야기(5) - 원주 운곡 원천석묘역
문촌 장익수(메인즈)
강원도 횡성군 강림면에서 주민들 대상으로 커피 바리스트 2급 과정을 교육하던 때 원주 지역의 역사문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는데, 당시 항상 수업을 진행하다보면 어느새 해가 넘어가는 적이 많아 그냥 되돌아 와야만 했습니다.
그러던 중 원주를 거쳐 강원도를 향할 기회가 생겨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마침 여유시간이 생겼습니다.
사단법인 한국문화교육연구원의 손은선 원장님께 손전화를 걸었습니다. 언제나 밝게 웃으시면서 전화를 받아주시는 원장님께 원주에서 가장 추천해 주고 싶은 역사문화 유적지를 소개해 달라고 했더니 선뜻 운곡 원천석묘역을 말씀해 주시더군요. 원천석과 관련된 여러가지 이야기와 함께 자세한 소개를 바탕으로 행구동으로 향합니다.
아침에 맞은 원주는 공해에 찌들지 않은 상쾌한 공기를 제공하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서울보다는 복잡하지 않지만, 서울에서 그리 멀리 않은 곳에 위치한 정착하고 싶은 도시중의 하나입니다. 치악산이 멀지 않을 뿐더러, 옆 횡성군은 한우고기로 유명한 곳입니다. 또한 강림면에 위치한 안흥찐빵도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타며 잘 팔리는 빵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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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 강원도 원주시 행구동 산 37
문의 : 033-733-1330 (원주 관광안내소)
지정현황 강원도 기념물 제75호(2000.11.18 지정)
개요
* 무학대사가 잡아준 묘터, 원주 운곡원천석묘역 *
운곡 원천석(1330∼?)선생의 묘로 2000년 11월 18일 강원도기념물 제75호로 지정되었다. 선생의 묘역 내에는 봉분 앞에 모비와 제사음식을 차려 놓을 수 있는 상석(床石)이 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 신도비가 있는 소박한 형태이다.
강원도 원주시 행구동 치악산 산자락에 있는 원천석의 묘 앞에는 ‘고려국자진사원천석지묘’라 새겨진 묘비와 상석이 놓여 있고, 묘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1670년(현종 11)에 세운 묘갈이 있다. 원천석의 유언에 따라 본래 표석을 세우지 않았다가 4대가 지난 후에 묘표가 세워졌다 하는데 묘갈의 글과 전서는 조선 중기의 학자 미수 허목( 1595~1682)이 짓고 썼으며, 글씨는 이명은이 썼다.
전하는 얘기에 의하면 원천석의 묘지는 무학대사가 잡아 주었다 한다. 묘역에는 1704년에 건립하고 1984년 개축한 재사인 모운재와 2006년 8월 31일 운곡대종회와 운곡학회에서 건립한 사당 창의사가 있으며, 모운재 옆에 시비가 세워져 있다.
* 운곡 원천석 선생에 대하여 *
원천석 선생은 어릴 때부터 학문에 밝아 목은 이색 등과 함께 성리학의 보급에 큰 역할을 했으며 조선 태종의 어릴적 스승이기도 하였다. 고려말에 정치가 문란해지자 이를 개탄하면서 치악산에 들어가 숨어버렸다. 조선왕조가 들어서 선생에게 벼슬이 주어지자 고려에 대한 충절을 끝까지 지켜 나아가지 않았다.
원주역사박물관 사료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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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정치에 나가려는 뜻을 품은 사람들은 자신의 얼굴 알리기 바빠합니다. 그런데 평상시에 그런 일을 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늘 안타까운 마음 가지고 있습니다. 보통 선거 6개월 정도의 기간에 사무실을 얻고 선거 홍보물과 명함을 제작하고 본격적인 선거기간동안 확성기로 거리를 누비며 인사를 하러 다니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이런 일들이 계속 반복되다보니 정치인에 대한 식상함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표달라 할 때는 시민 알기를 하늘처럼 알다가 막상 금뱃지를 달면 왕처럼 군림하려 하니 더욱 그렇습니다.
원천석 선생의 이름이 생소했는데 자료를 찾아보니 대단한 사람이라고 느껴집니다. 성리학을 보급하는데 이색과 더불어 공이 크다는 것도 발견하였습니다. 이래서 역사를 계속 공부해 나가야한다는 것인가 봅니다.
이색은 어려서부터 총기가 뛰어났고 독서를 즐겼으며 아버지인 이곡의 친구이자 안향, 백이정의 학문을 계승한 익제 이제현을 찾아가 정주학을 배웠습니다. 이제현은 백이정의 문인이자 권부의 사위로 28살 때 원나라에 가서 공부하고 돌아와 성리학을 이루었습니다. 그의 학문은 이색으로 이어졌습니다. 정몽주, 정도전, 권근, 이숭인 등 고려 말의 대표적 성리학자들은 대부분 이색의 문하에서 배출된 인물들입니다.
고려말의 충신이라 일컬어지는 정몽주와 조선 건국의 기초를 다진 정도전
두 사람은 이색을 같은 스승으로 두었지만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됩니다.
원천석 선생은 정몽주와 같은 길을 간 사람입니다.
조선이 건국되고 이성계가 왕위를 계승받는 것을 목도하고, 고려 500여년의 역사와 향수에 젖어 원주 치악산으로 은거하러 들어가게 됩니다.
이방원의 스승이었던 원천석을 중앙관직으로 부르기 위해 왕위를 이어 받은 태종(이방원)이 3번이나 직접 원주로 행차하였으나 번번히 아무런 소득도 없이 되돌아 갔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원주에는 태종과 사연이 깃든 곳이 많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결국 운곡선생은 조선의 하늘 아래에서 끝내 관직에 나서지 않고 농부가 되어 초야에 묻혀 지냈다고 합니다.
이방원이 태조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하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이 된 후 스승이 그리워 강원도까지 친히 행차하였건만, 일개 백성이 왕을 피해 다른 곳으로 피신했다는 것은 그만큼 그가 고려에 대한 향수가 깊었기 때문일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그리워한다는 것은 자신의 마음속에 커다란 애착을 품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제 기억속에 여전히 살아 움직이며 꿈틀거리는 곳이 있습니다. 화도사랑(화도사랑공부방 포함)과 남양주교복은행입니다. 지금은 두 단체와 아무런 상관없는 사람으로 남아 있으나 때로는 그에 소속된 사람들과의 교감과 동역이 그리워지곤 합니다.
물론 큰 명분없이 서로 싸우는 것이 싫어 그곳을 떠나 지금에 이르렀지만, 애착의 강도가 컸던 곳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더군요.
진접에 사무실을 오픈하고 나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알게 됩니다.
특별히 악기를 통한 음악테라피를 하시는 김동문 목사님과의 만남 정말 즐거웠습니다. 비슷한 마인드에 비슷한 생을 살아와서 일까요? 오랫만에 대화가 이렇게 맛있을 수 있을까 할 정도로 4시간의 훌쩍 넘기며 웃음과 생각을 나누었습니다.
필요할 때 그곳에 없다 하여 그 사람이 잊혀지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원주에 운곡 원천석묘가 있듯이 사람은 어디에선가 잊혀지지 않을 존재로 남아야겠습니다. 누군가 지우개로 기억속의 우리를 지우기 전에 잊혀지지 않는 사람으로 있으려면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감동을 주거나 누군가의 스승이 되어 후학을 키우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청소년들을 위해 무엇인가 이 지역에서 다시 무엇이가 해 보려합니다.
"청소년 문화의 집"
버킷리스트가 또 하나 늘었습니다.
날마다 하나씩 늘어가기만 합니다. 이러다가 제 풀에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좋은 일을 만들고 기획해나가는 요즘 행복하기만 합니다.
하나 하나 차근 차근 세월은 저절로 쌓여지듯이 하루하루를 그렇게 무엇인가 좋은 것으로 쌓으면 원하는 결실을 맺어갈 것이라 생각하며 하루를 다시 시작해 봅니다.
누군가 나를 알아주는 것보다 내가 누군가를 알아보기 위해 노력하는 하루가 되어야겠습니다. 그리고 누군가 나를 찾도록 하기 위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활동하고 가르쳐야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원천석묘를 둘러보며 느꼈던 점은 왕이 되어 한 나라를 다스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 나라를 다스릴 사람을 키우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지역의 대표적인 정치인으로 성장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사람으로 성장하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누군가의 희망이 되고
누군가의 안식이 되고
누군가의 버팀목이 되는 그런 사람이면 우리는 충분히 잘 살았다 할 것입니다.
겨울이 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추운 날씨가 이어집니다. 마음까지 차가운 사람들을 따뜻한 마음으로 녹이는 하루가 되기를 바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