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326 역사문화탐방이야기(15) - 메밀 꽃 필무렵에 다녀온 이효석문학관 (강원도 평창군)

by 문화촌 posted Mar 27, 2016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160326 역사문화탐방이야기(15) - 메밀 꽃 필무렵에 다녀온 이효석문학관 (강원도 평창군)

 

문촌 장익수(메인즈)

 

누군가 그리워질 때면 꼭 한번 돌아보는 소설이 있습니다. 바로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입니다. 봉평 막국수가 전국적으로 유명합니다. 아마 봉평은 이효석의 작품 때문에 평생 먹고 살 정도로 유명해진 땅이라 생각합니다. 

 

---
이효석(李孝石, 1907년 2월 23일 ∼ 1942년 5월 25일)은 일제 강점기의 작가, 언론인, 수필가, 시인이다. 한때 숭실전문학교의 교수를 지내기도 했다. 호는 가산(可山)이며, 강원 평창(平昌) 출생으로 한국의 대표적인 단편소설 작가이다.

출처 _ 위키피디아


문학을 하거나 음악을 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어려운 생활고로 본인의 재능을 포기하거나 다른 길로 가려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두 분야에서 성공하는 사람은 1% 도 안될것입니다. 나머지는 실패하고 좌절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거나 자신의 재능과는 전혀 다른 길을 선택하게 됩니다. 안타까운 일 중의 하나이기는 하지만 피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가난 앞에 장사가 없다는 말이있습니다. 아무리 버텨 내려해도 하루 하루 일용할 양식이 없다면 그 모든 것들을 견뎌내는 것은 어렵습니다. 겪어본 사람들은 알 것입니다. 

 

이효석이 생활고로 인해 겨우 취직한 곳은 조선총독부 검열관이지만, 변절자라는 비난에 열흘만에 그만둡니다. 의식있던 지식인이 일본을 위해 일하는 것이 옳지 않다 생각되었는지 짧은 기간동안 일한 후 그만두고 함경북도 경성으로 떠나게 됩니다. 


평양 숭실전문학교의 국문학과 영문학 교수가 된 이후가 되어서야 가난뱅이 작가에서 벗어나 여유로운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 그가 1940년 평생 동반자로 삼은 부인 이경원과 차녀가 죽자 2년뒤인 1942년 뇌척수막염으로 삶을 마감할 때가지 이효석이 살았던 삶은 메밀꽃 필 무렵에 나오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서양 영화와 서양에서 온 가수나 무용단의 공연을 보며 넋을 잃기도 했던 도시인의 삶을 살았다 합니다. 

흔히 사람의 삶을 좇아 그 궤적을 따라 가고 싶은 결심을 하게 됩니다. 


아마 이효석은 서구적 삶을 추구하며 살았겠지만 정작 그 마음 깊은 곳에서는 봉평마을에서의 향수가 살아 움직였을 것입니다. 제 마음속에 세종시로 바뀐 고향땅에서의 삶의 기억을 늘 간직하며 살아가듯이 말입니다.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 메밀꽃 필 무렵 중에서


그리고 그 자신의 삶의 자세는 아래와 같이 작품속에 투영된 것 같습니다. 


"금욕은 프롤레타리아의 도덕이 아니예요 - 솔직한 감정을 정직하게 표현하는 것이 프롤레타리아가 아닐까요?"

나오미의 자태에는...얼마나한 정도의 프롤레타리아 투사가 될까도 자못 의문이었다. 
- 너무도 아름답고 사치하고 모던한 나오미였다. (오리온과 능금, 이효석)


잠시 이효석의 좌상 옆에 앉아 그와의 문학적 호흡을 길게 해 봅니다. 

 

우리는 항상 숨겨진 가면을 쓰고 살아가곤 합니다. 

 

자신의 삶은 그렇지 않은데 글로 표현되거나 사람들을 만날 때 좋은 이미지로 포장하려 합니다. 저 또한 그렇습니다. 이왕이면 좋은 모습으로 남고 싶어하는 것은 자연의 이치입니다. 

 

오는 4월에 있을 총선때문에 정치와 정치인을 생각해 보곤 합니다. 

 

정치를 하기 위한 권력획득의 목적이 사람을 위함에 있는지 자신의 권력욕에 있는지 구별이 안갈때가 많이 있을 것입니다. 저 자신도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획득한 권력은 내가 소유한 부도 아니고 지식도 아니고 재능도 아닙니다. 시민이 주는 힘일 뿐입니다. 그래서 대한민국 국회의원이 된 사람은 시민이 빌려준 힘을 가지고 시민을 위해 사용할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 힘을 자신을 위해 쓴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정치인에 대한 인식이 나쁘게 된 것 아닐까요?

 


요즘 국내 잘 나가는 기업 삼성처럼 수직적 문화를 수평적 문화로 정착시키기위해 회사의 방향성을 바꾸는 곳이 많아진다고 합니다.  

 


정치를 하는 사람들의 자세도 그와 같이 변하기를 바래 봅니다. 수평적으로 시민들과 소통하고, 필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이 정치를 하면 좋겠습니다. 백성을 위한 마음과 그 백성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삶을 태우는 사람이 권력을 차지하기를 바랍니다. 금뱃지의 영광을 획득하는 순간 태도가 바뀌는 정치적인 정치인보다는 금뱃지를 다는 순간 기득권을 시민들에게 내어주는 이를 기다려 봅니다. 그런 사람이 꼭 남양주 갑,을,병의 대표 주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대한민국 곳곳에 퍼진 봉평 메밀국수집은 이효석이 그려놓은 문학작품 속에 고스란히 그 상징성을 대표하는 이미지로 각인되어 친근함으로 다가오곤 합니다. 

 


갑자기 찾아온 꽃샘추위가 지나고 나면 따뜻한 봄날이 오고 곧 무더운 계절이 다가옵니다. 평창까지의 여행이 쉽지 않겠지만, 메밀꽃 필무렵인 9월쯤 평창을 다시 찾으려 합니다. 이효석이 살았던 봉평은 포근함과 평화로움을 주는 땅입니다. 같은 장소에서 다시 이효석을 마주한다면 그렇게 말해야 겠습니다. 


"메밀꽃 필 무렵에는 늘 선생님과 술 한잔 기울이고 싶습니다." 라고...


평생 살아가면서 술잔 기울일 만한 사람을 많이 만들어야겠습니다. 무슨 일을 할 때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이 결국 주변에 마음을 나눌만한 사람들입니다. 한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이 천하를 얻는 것보다 소중하니까요. 

봉평 이효석을 떠올리며 보내고 싶어지는 날입니다. 하루를 살아가는 이유가 내가 아닌 타자를 위한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시 한번 결심하며 집을 나서 봅니다. 

 


오늘은 봉평 메밀 국수집을 찾아 하루의 생명을 이어가야겠습니다. 

 

150826_이효석문화촌_0001.jpg

 

150826_이효석문화촌_0002.jpg

 

150826_이효석문화촌_0003.jpg

 

150826_이효석문화촌_0004.jpg

 

150826_이효석문화촌_0005.jpg

 

150826_이효석문화촌_0006.jpg

 

150826_이효석문화촌_0007.jpg

 

150826_이효석문화촌_0008.jpg

 

150826_이효석문화촌_0009.jpg

 

150826_이효석문화촌_0010.jpg

 

150826_이효석문화촌_0011.jpg

 

150826_이효석문화촌_0012.jpg

 

150826_이효석문화촌_0013.jpg

 

150826_이효석문화촌_0014.jpg

 

150826_이효석문화촌_0015.jpg

 

150826_이효석문화촌_0016.jpg

 

150826_이효석문화촌_0017.jpg

 

150826_이효석문화촌_0026.jpg

 

150826_이효석문화촌_0027.jpg

 

150826_이효석문화촌_0029.jpg

 

150826_이효석문화촌_0030.jpg

 

150826_이효석문화촌_0031.jpg

 

150826_이효석문화촌_0033.jpg

 

150826_이효석문화촌_0034.jpg

 

150826_이효석문화촌_0036.jpg

 

150826_이효석문화촌_0037.jpg

 

150826_이효석문화촌_0038.jpg

 

150826_이효석문화촌_0039.jpg

 

150826_이효석문화촌_0040.jpg

 

150826_이효석문화촌_0041.jpg

 

150826_이효석문화촌_0042.jpg

 

150826_이효석문화촌_0043.jpg

 

150826_이효석문화촌_0044.jpg

 

150826_이효석문화촌_0045.jpg

 

150826_이효석문화촌_0046.jpg

 

150826_이효석문화촌_0047.jpg

 

 


Articles

1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