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121 역사문화탐방이야기(27) - 태릉에서 산책길 넘어 강릉(명종)을 찾다

by 문화촌 posted Nov 03,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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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121 역사문화탐방이야기(27) - 태릉에서 산책길 넘어 강릉(명종)을 찾다

 

날이 급격하게 추워졌습니다. 문정왕후가 그렇게도 아끼며 왕으로 세우기 위해 혈투를 마다하지 않았던 과거속으로 가 봅니다. 연산군을 밀어내고 반정에 성공한 중종은 통치기간 내내 반정공신들의 입김으로 늘 두려움에 떨어야했으며, 자신 또한 당당하게 정책을 펼치지 못하는 군주로서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자신에게 정말 소중한 사람을 지키지 않고 그냥 바라만 보는 군주로서의 이미지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함께 묻혀야될 문정왕후의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인지하고도 어쩌지 못하는 유약한 왕이었다 생각합니다.

 

문정왕후가 중종과 죽어서 함께 하고 싶어 선정릉역에 있는 정릉에 묻히고자 했으나 당시 침수피해등으로 위치가 좋지 않다 하여 지금의 태릉에 자리 잡게 되었으며, 결국 사후 남편인 중종과는 따로 묻히게 됩니다. 그녀가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앉히기 위해 노력했던 세월만큼 명종의 독립적 왕권 행사를 제한하면서 얼마나 많은 마음의 고통을 주었을까 생각해 보니, 장성한 조선의 군주로서 애처롭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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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

중종과 문정왕후 윤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왕이 되기 전에는 경원대군(慶源大君)[1] 이었으며, 인종이 즉위할 때까지만 해도 그저 전왕 중종의 아들이자 현왕인 인종의 이복동생일 뿐이었으나 인종이 즉위한지 8개월만에 급사함으로서 왕이 되었다. 어릴 때 양눈에 안질이 있었다는데 인종의 갑작스러운 승하로 자신의 생명의 위협을 느낀 윤임이 대군은 안질 때문에 눈이 안보이니 왕을 못한다는 핑계로 그를 후계 선상에서 제외시켜 보려 했지만 이언적 등이 대군의 승계를 지지하고 문정왕후가 강력히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면서 포기하게 됐다.

 

따라서 생모인 문정왕후 윤씨가 수렴청정으로 대리청정을 시작했다. 그러나 을사사화와 양재역 벽서 사건으로 대윤의 대신들과 사림들이 대거 숙청되었고, 권세를 얻은 소윤(왕의 외숙부 윤원형) 일파의 부정부패는 엄청나서 백성들의 반감을 샀다. 덤으로 보우를 통한 불교 중흥은 유학자들의 반감을 샀다! 그야말로 사대부 입장에서는 외척 + 사화 + 불교 + 여자의 막장 4종 세트. 그래서 그런지 유명한 의적(?) 임꺽정의 활약도 바로 이 명종 재위 기간이었다.

 

출처 _ 나무위키

 

 

"권불십년"

 

권력이 10년을 가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권력이 사라지자마다 사람들이 우수수 떠나가는 것이 권력의 속성입니다.

 

"화무십일홍" 아무리 화려한 꽃이라도 10일을 견디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의 인생에서 꽃 피우는 시절이 있다는 것이고 그것이 영원하지는 않다는 말입니다.

 

명종은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으로부터 벗어나 독립적 왕권을 행사하기 위해 홀로 자신의 길을 찾아 걸어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귄력장악~~~

 

권력은 피를 나눈 형제와 부모지간에도 나누기 힘들다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와 자신 사이에 놓여있는 천륜때문에 과감히 자신의 길을 위해 치고 나가지 못한 것도 사실이었을 것입니다.

 

숲속 길을 따라 걷는 이 길은 명종을 만나러 가기 위해서 난 길이며 한적한 곳입니다. 곳곳에 멧돼지가 출현하니 조심하라는 문구도 여러개 발견합니다. 한참 추워지기 시작했을 때 방문했으니, 지금 돌아보면 뿌듯할 뿐입니다. 어디를 가든 역사문화탐방 장소가 눈에 들어옵니다. 지금 머물고 있는 아프리카 모잠비크도 마찬가지입니다.

 

 

명종과 정철은 어린 시절 친구 사이였습니다.

 

정철의 집안은 명종이 12살의 나이에 왕이되면서 몰락했습니다. 이원형이 인종 죽위 대척점에 있던 윤임 일파를 몰아내기 위해 정철의 매형 계림군을 중심으로 한 을사사화를 조작했던 것이 결정적입니다. 하루아침에 대가집 정승댁이 귀향살이에 폭삭 망하는 신세로 전락 되어 버렸습니다.  이 사건으로 계림군은 죽고, 큰 형도 유배도중 사망했으며 그와 가족들 역시 유배길에 올랐습니다.

 

당시 10살에 불과했던 정철...왕이 될거라 생각하지 못했던 친구를 둔 덕에 하루아침에 몰락했던 집안을 바라보며 명종에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아마 당시 정철은 차라리 왕이 될 가능성이 없었던 명종이 왕이 되어 나타난 명종보다 좋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어린 시절 자신의 뿌리가 송두리째 무너지는 것을 바라보고 심각한 자아 상실감에 빠졌을 것입니다.

 

 

저도 그런 비슷한 감정을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상실감" 또는 "불안감" 으로 나타나는 성향입니다. 19살, 21살 때 부모님의 죽음으로 삶에서 가장 중요하다 여기는 요소인 돈과 권력에 대한 욕심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생각보다 성격적인 불안 요소들이 많이 존재해 왔던 것도 사실입니다. 가령 헤어짐에 대한 아쉬움이나 두려움이 없습니다. 인연에 대한 정리를 정리하는데도 냉정함을 발휘해 왔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꼭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가고 있습니다.

 

 

명종은 어머니라는 든든한 뿌리가 있었기에 왕권을 행사하고 그 자리를 보존하였습니다. 그 뿌리마저 없었다면 명종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이리 저리 헤메는 일이 많았겠지만 다행히 강력한 어머니의 권력은 그의 안전한 왕위자리를 보존하게 해 주었던 셈이지요.

 

 

우리에게도 뿌리가 중요합니다.

 

누군가의 삶을 자세히 살펴보면 불안해 하는 사람들은 그렇습니다. 자꾸 주변의 상황과 말에 흔들립니다. 그 이유는

 

자신을 지탱해 줄 뿌리가 없거나

든든한 재산이 없거나

든든한 권력이 없거나

 

그 무엇보다도 스스로 모든 어려움을 헤쳐나갈 자신감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런점에서 무한 자신감을 소유한 저는 그나마 다행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 생각합니다. 타인이 가지고 있는 권력과 재력앞에 무릎꿇지는 않으니까요.

 

 

명종은 특별히 권력만큼은 든든했습니다.

 

 

그러나 명종이 가지고 특수성...즉, 아버지 중종은 피의 숙청을 통해 왕위에 올랐으며 그 주변에 1등 공신들의 영향이 컸던 중종의 계비인 어미니 문정왕후와 그녀의 수렴청정은 명종의 어린시절 성격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연산군의 삶이 더욱 비참했던 삶도 선왕 재위기간 중 자신의 어머니가 사사된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모친인 폐비 윤씨는 사사 당시 친정어머니 신씨에게 세자가 자라서 왕이 되거든 피를 토한 금삼을 넘겨줄 것을 유언했고, 이는 후일 무오사화와 갑자사화의 도화선이 된다. 연산군은 자신의 모친이 되는 윤씨의 죽음의 원인으로 역사에 부정적 이미지로 그려지는 군주가 되었습니다.

 

 

명종의 친구 정철 또한 예외가 아닙니다. 어린 시절 몰락했던 집안 상황을 바라보고 자라오면 26세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별시문과에 또 다시 장원으로 합격하자 명종이 정철을 축하해 주며 연회를 베풀었습니다. 그만큼 명종은 정철에 대한 우정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철의 가슴속에는 한이 서려 있거나 불안이 늘 존재했을 것입니다. 자신을 위협하는 요소들이 있을때마다 정철은 술과 여자를 통해 도피처를 찾으며 마음을 달랬으니 말입니다.

 

 

명종 재위기간 중에 임꺽정의 난이 있었습니다. 임꺽정의 난(1559-1562년)은 임꺽정이 당시 유랑민들과 도적들 및 불평분자들을 규합하여 1559년(명종14년)부터 1562년(명종 17년)까지 무려 3년 동안 황해도, 경기도, 강원도 일대를 중심으로 일으킨 난입니다. 도적이었지만 도적이 아니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이나 관리들이 볼 때는 도적이었지만 백성들이 볼 때는 도적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런 연유로 조정에서 토벌대를 파견하는 등 도적을 소탕하려 했지만 번번이 실패로 끝나곤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중앙 권력 장악과 지방 관료들의 백성을 위한 선한 정치력이 필요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관료들이 썩어가고, 중앙 권력 누수현상으로 뇌물이 성행하게 되는 것들이 결국 정치계를 부패하게 만드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결국 1565년 문정왕후가 죽기까지 20년 동안 명종은 자신만의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지니지 못한 채 문정왕후와 윤원형의 전횡 속에서 왕위를 지킬 수 밖에 없었습니다. 문정왕후가 죽은 뒤 윤원형과 보우(普雨)를 내쫓고 인재를 고루 등용하여 정치를 하려고 노력했으나, 그 뜻을 보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6.13 지방선거 또한 한발 앞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번 기회에 권력에 줄을 대어 으쓱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권력 획등과정에서 승리하면 함께 했던 분들이 전리품(권력의 자리, 재정)을 나누어 가질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에 기대합니다.

 

무엇보다 백성들의 곤궁한 처지와 그들이 원하는 필요를 채워주는 후보자 또는 당선자가 많아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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