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214 역사문화탐방이야기(12) 의로운 삶을 살다간 장군을 찾아서...(의정부 정문부장군묘)

by 문화촌 posted Feb 16,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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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214 역사문화탐방이야기(12) 의로운 삶을 살다간 장군을 찾아서...(의정부 정문부장군묘)

 

문촌 장익수(메인즈)

 

요즘 들어 마음을 흔드는 것은 어떻게 살아야 의롭게 사는 것이냐는 것입니다. 누군가 나에게 잘해 주기를 바랄 때 나 혼자만 안전하고 평탄한 길을 택하면 그런 대접이 따라오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위해 나보다 그를 위한 활동이나 행위가 있을 때 그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를 바르게 만들겠다고 나서는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날 갑자기 낙하산을 타고 타지역에서 왔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낯선 시선으로 그를 경계합니다. 우리사회 곳곳에 퍼져 있는 배타적 부분을 간과해서는 뜻을 이루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오랫동안 터를 닦아 지역활동을 펼친 사람들은 단기간에 목적을 가지고 외부에서 들어온 이들을 달갑게 받아주지 못합니다. 물론 더불어 사는 세상에서 무엇인가 힘을 합해 도모하지 않으면 이루어 낼 수 있는 것은 없기도 합니다. 신구 세력이 서로 힘을 합하면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해 낼 수 있을테니까요. 

 

이웃사랑과 지역사랑 그리고 나라사랑을 실천해 온 인물들이 많아지는 것은 우리지역뿐 아니라 국가운영에 있어서도 매우 바람직한 현상입니다. 우리 시대에도 그런 나라 사랑하는 정신이 필요하다 느끼며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 애썼던 선조들의 노력과 흔적을 찾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하여 오늘은 의정부로 향합니다. 


"정문부 장군"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한 노력은 평상시 구국을 위해 자신보다는 타인을 위해서 살아가려 했던 삶의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요?

 


정문부(鄭文孚, 1565년 ~ 1624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의병장이다. 본관은 해주(海州)이며, 호는 농포(農圃), 자는 자허(子虛),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1615년 부총관에 임명되고 다시 병조참판으로 임명되지만, 북인의 횡포에 관직을 고사하고 야인으로 돌아간다. 1623년 인조가 반정으로 즉위하고, 전주부윤이 되었지만, 1624년(인조 2년) 이괄의 난에 연루되었다는 누명을 쓰고, 고문을 받다가 죽게 된다. 향년 60세. 사후에 함경도 지방민의 송원(訟寃)에 따라 충의(忠毅)라는 시호를 받고 신원되어 좌찬성을 제수받는다.

 

경성의 창렬사, 부령의 청암사, 진주의 충의사(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61호)에 모셔졌고, 후일 숙종 때 이 전투를 기념하여 함경북도 길주에 북관대첩비가 세워졌다. 농포 정문부는 임진왜란 때 혁혁한 전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공을 인정받지 못했다. 오히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중에서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나기 전 두 아들에게 벼슬을 구하지 말고 남쪽 지방인 진주에 가서 살라고 유언하였다. 문집 《농포집(農圃集)》이 있다.

 

출처_ 위키피디아

 


임진왜란으로 일본이 조선을 침략했을 당시 속수무책으로 방어선을 넘겨주고 피난을 거듭했던 조선의 14대 왕 선조의 비참했던 모습이 그려지는 날입니다. 

 

엊그제 일제 36년 치하에서 일본군에 위안부로 끌려 갔던 조선의 여인들을 공개적으로 비하하는 동상을 찍은 사진을 보며 일본에 대해 참았던 분노가 일어납니다. 다시 한번 각오해 봅니다. 잘못한 일이 있으면 인정하고 살아야겠다고...보통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용서할 수 없는 것은 그 사람이 행한 일을 시인하지 않고, 적반하장으로 기고만장한 태도를 보일 때입니다. 지금 일본의 태도가 그렇습니다. 


요즘 주변에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가까이에는 고종황제의 증손녀 이홍공주입니다. 그동안 이 분의 삶이 이렇게까지 곤고한데 주변의 도움이 크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독립 운동을 했던 후손들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뜻을 위해 한자리에 모여 무엇인가 일을 도모할 때 명분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 명분이 없는데도 일을 도모하려 하면 나라의 역적이 될 수 있습니다. 개인의 사리사욕이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나라나 사람사이에 서로 싸움을 시작해서 멈춘 후 잘못한 결과에 대해 먼저 고개 숙인다 하여 그것이 부끄러운 것은 아닙니다. 깨끗하게 인정하고 먼저 손을 내밀어 악수하면 오히려 존경받기도 하지만 결국 이기는 싸움이라 생각합니다. 

일본은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동아시시아 대 제국을 꿈꾸며 전쟁을 일으켜 우리나라를 포함한 주변국을 피로 얼룩지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조선의 여성들로 하여금 군 위안부로 강제노역하게 한 것이 생계형 성노동이라느니 식민지근대화론을 근거로 조선개화와 발전에 기여했다느니 하면서 전쟁의 정당성을 펼칠 때 그 논리를 따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일본에 의해 침략당한 조선을 구하기 위해 함경북도 북평사직을 맡고 있던 정문부 장군이 일으킨 의병이 승승장구하던 일본을 격퇴하여 승리 한 것을 기념하여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를 세웠습니다. (숙종때 북평사 최창대가 함경북도 길주군 길주면 임명면, 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함경북도 김책시 임명동에 세운 전공 기념비)


이 북관대첩비를 일본이 오랫동안 야스쿠니 신사 깊숙한 곳에 숨겨 있던 것을 반환운동을 펼쳐 국내로 다시 돌아오게 했습니다. 북한땅에 있는 북관대첩비의 사본이 이곳 정문부 장군 묘소 올라가는 길에 있습니다. 


무엇이든 작은 것을 탐하면 큰 것을 이루지 못하게 됩니다.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정말로 지켜야 되는 원칙이 있다면 바로 내가 먼저 손해볼 각오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서로 손해 보지 않기 위해 자기 주장만 하다보면 결국 돌아오는 것은 싸움밖에 없습니다. 

교각살우(矯角殺牛)라는 말이 있습니다. 

소의 뿔 모양을 바로잡으려다가 소를 죽인다는 뜻으로, 작은 흠이나 결점을 고치려다가 도리어 일을 그르치는 것을 이르는 한자성어입니다. 굽은 것을 바로잡으려다가 지나치게 곧게 하여 오히려 나쁘게 된다는 뜻의 교왕과직(矯枉過直)이나 작은 것을 탐하다가 큰 손실을 입는다는 뜻의 소탐대실(小貪大失)과 비슷한 말인데 우리 속담에 비슷한 뜻으로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草家三間) 다 태운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 사이에 얼굴을 맞대고 대화하다보면 이해 못할 일도 많이 생깁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이 받아들여지지 않기때문에 생기는 섭섭함이 화를 부르기도 합니다. 서로 따뜻한 말로 평생을 살아가기에도 짧은 인생입니다. 스트레스 받아가며 상대방을 이해 못하는 일보다는 따뜻하게 감싸주는 일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일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악수하여 손 내밀고
잘못한 일은 먼저 시인하고
남들이 하기 싫은 일은 먼저 시작하고
잘하는 것에는 박수를,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질책하고
내 배를 불리기 위한 노력보다는 타인의 주머니를 채워주는 일입니다. 

 

오늘 내 앞에서 타인을 비방하고 욕하는 사람은 결국 어디에선가 나에 대한 비난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비오는 아침 조용히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해 봅니다. 

 

타인에 대한 말을 전할 때는 비난보다는 칭찬을
나에게 잘못했던 한가지보다는 아홉가지 잘했던 것만 기억하려 합니다. 

 

평상시에 이런 태도로 무장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나라가 혼란에 빠져있을 때 반드시 나라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나라에 충성하는 사람은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오늘도 몸과 마음을 다스려 봅니다. 의로운 뜻을 가진 의병을 모아 일본의 침략에 대응한 정문부 장군과 같은 사람이 되도록 한걸음 한걸음 걷게습니다.

 

어느덧 봄이 우리곁에 다가왔습니다. 


비가 내린 후 성큼 다가올 손님을 맞이해야겠습니다. 

 

열심히 지역 일꾼이 되기 위해 노력하시는 모든 분들 존경스럽습니다. 

그 마음 변치말고 대한민국을 괜찮고 살기좋은 나라로 만들어 주시기를 바라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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