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미국을 사랑해도 될까?

by 평화마을 posted Aug 05, 2026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그래도 미국을 사랑해도 될까?

Darf man die USA doch noch lieben?

* 출처: [Der Spiegel(쉬피겔)] (2026.7.3.)

 

Philipp Oehmke

 

그래도 미국을 사랑해도 될까.hwpx

 

요약문

이 글은 과거 독일인들에게 동경의 대상이었던미국의 문화적 서사와 현재의 냉혹한 정치적 현실 사이의 괴리를 깊이 있게 고찰합니다. 저자는 할리우드 영화와 팝 음악을 통해 형성된이상적인 미국관이 도널드 트럼프와 J.D. 밴스의 등장으로 대변되는폐쇄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변화와 충돌하며 겪는 당혹감을 서술합니다. 특히 공항 구금 경험과 오하이오 방문 등을 통해관념 속의 미국이 실재와 얼마나 멀어지고 있는지를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과거의 향수와 현재의 실망이 공존하는 상황 속에서도 저자는미국이라는 국가와의 복잡한 애증 관계를 한때 사랑했던 연인을 그리워하는 마음에 비유하며 성찰합니다. 결과적으로 이 텍스트는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유럽인이 간직해온 미국적 가치의 유효성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

[본문]

 

축하해, 미국! 여전히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는 전() 연인에게 하듯 너에게 축하를 보낸다.

 

첫 번째 의구심이 들었던 것은 로스앤젤레스(LA) 공항의 쓸쓸한 지하실에서 약 2시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2021년 여름, 세계는 코로나 19의 폐쇄(lock down)에 갇혀 있었고, 조 바이든이 미국 대통령이었으며, 도널드 트럼프는 지나간 역사처럼 보였다. 여전히 입국 제한 조치가 시행 중이었지만, 나는 그 직전에 미국에서 살았던 적이 있었기에 베를린 주재 미국 대사관에서 특별 허가증을 발급받았다.

 

그들은 내 비자에 "Travel ban exempt"(입국 금지 면제)라는 도장을 찍어주었지만, 미국 정부 기관의 다른 부서에 이 사실을 알리는 것은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어쨌든 며칠 뒤, 심사대 뒤에 있던 입국 심사관에게 내 비자에 찍힌 도장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는 고개를 젓더니 짧게 통화를 했다. 그러자 총구를 카펫 바닥으로 향한 경비원 두 명이 나타나 나를 공항의 지하 공간으로 끌고 갔다. 여권과 휴대폰을 압수 당했고, 경비원들에게 문의를 해보아도 "앉으세요, 부를 때까지 기다리세요"라는 답변만 돌아왔다. 그 광경은 마치 크로이츠베르크 동사무소, UNHCR 난민 캠프, 그리고 감옥을 섞어 놓은 듯했다.

 

창문 하나 없고, 더 이상 어떠한 법도, 예의도, 신분도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자의적 권력만이 지배하는 뜻밖의 평행 세계에 삼켜진(swallow) 기분이었다. 진짜 세상의 스타벅스 매장과 알라모(Alamo) 렌터카 창구로부터 겨우 무거운 금속문 두 개와 계단 하나 떨어져 있는 곳에서 말이다.

 

저녁 무렵이 되어가자 나는 이곳에서 밤을 보내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도합 10년 가까이 살았던 미국이라는 국가에 대한 나의 신뢰는 그날 저녁 산산조각 났다.

 

그 이후 트럼프는 두 번째로 당선되었고, 사법 국가를 후퇴시켰으며, 이민자 법집행국(ICE) 사냥꾼들이 이민자들을 추적하게 만들었고, 국가에 독재적 색채를 입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미국을 사랑한다. 하지만 그에 대해 정당화해야 하는 일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왜 내가 어쩔 수 없는지, 왜 많은 독일인이 어쩔 수 없는지, 그리고 그럼에도 왜 그것이 괜찮은지에 대해 나는 당시 LAX 공항의 지하 공간에서 처음으로 깊이 생각해 보았다.

 

예를 들어 2017년 봄, 도널드 트럼프의 첫 번째 임기가 아직 무난하게 시작된 지 몇 달 지나지 않았을 때, 나는 뉴욕을 떠나 오하이오주의 아팔래치아 지역으로 여행을 떠났다. 당시까지만 해도 무명이었던 한 작가가 자신의 고향에 대해, 그리고 왜 자신의 친척들이 분노하고 어쩌면 트럼프에게 투표했는지에 대한 책을 썼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당시 대통령을 거부하는 공화당원들을 뜻하는 '네버-트럼퍼(Never-Trumper)'임을 강조했다.

 

그는 자신의 책에서 약물 중독자인 어머니 밑에서 자란 아팔래치아의 불안정한 어린 시절을 극복하고, 먼저 해병대에 입대한 뒤 예일 대학교에서 공부하게 된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 아팔래치아에서 해병대를 거쳐 예일대로 이어지는 미국의 약속: 1970년대 서독에서 태어난 누군가에게는 온갖 이미지와 이야기의 지평을 넓혀주는, 미국적 삶의 기호들로 가득 찬 서사였다.

 

존 덴버(John Denver)의 노래 "Take Me Home, Country Roads"는 지금까지도 여러 분데스리가 경기장과 옥토버페스트 텐트에서 불리고 있으며 아팔래치아를 노래했다. 해병대는 미국의 서사, 그들의 의식(ritual), 단결력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었으며,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 풀 메탈 재킷(Full Metal Jacket)’ 같은 작품을 통해 유명해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통령들을 배출하는 예일 대학교가 있었다.

 

따라서 나는 오하이오의 한 호텔 방에서 그 낯선 작가를 직접 만나기 전부터 이미 머릿속에 그에 대한 많은 정보를 축적해 두고 있었고, 이러한 참조 기준들을 바탕으로 그와 나 사이에 삶을 바라보는 깊은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을 것이라 지레 짐작했었다.

 

서독에서의 어린 시절은 나를 이미 준비시켜 두었다. 1980년대 초반부터 ARDZDF(독일 공영방송)가 먼저는 저녁 시간대에, 나중에는 핵심 시간대에 쏟아부었던 시리즈물들[원조 우뢰매(Ein Colt für alle Fälle, The Fall Guy)], [매그넘(Magnum)], 나중에는 [마이애미 바이스(Miami Vice)]. 스티븐 스필버그의 [E.T.]는 우리에게 미국 교외(suburbia)의 삶을 가까이 가져다주었고, [백 투 더 퓨처]의 마이클 J. 폭스는 패딩 조끼, 칼빈 클라인, 스케이트보드, 그리고 그렇다, 휴이 루이스 앤 더 뉴스(Huey Lewis and the News) 사이에서 미국적인 '쿨 함'을 선사했다. 톰 크루즈는 [탑건]을 통해 서독 어린이들의 방에 '미국적 영웅'의 개념을 아주 강렬하게 주입시켰고, 실베스터 스타트론은 [록키]에서 신분 상승의 서사와 영원한 '절대 포기하지 마(never give up)'를 각인시켰다.

 

1950년대 십대(Teenager)라는 개념의 발명, 엘비스 프레슬리를 통한 청소년의 해방, 블루스에서 발전한 록앤롤의 힘은 다시 노예제에 대한 저항의 표현이었다. 미국 팝문화의 뿌리는 언제나 반문화(counterculture)에 있었기에, 1960년대 미국의 반문화는 독일 학술계 68운동의 대척점보다 훨씬 더 멋져 보였다. 블랙 팬서의 스타일리시한 멤버들, 앨런 긴즈버그와 윌리엄 버로스를 위시한 비트닉(Beatniks), 조안 디디온이나 게이 탈레스의 뉴 저널리즘, 그리고 메인 스트림을 위한 작가주의 영화인 뉴 할리우드가 그러했다. 마이클 잭슨과 프린스의 가벼우면서도 거의 마법 같은 매력, 휘트니 휴스턴의 화려함, 혹은 “Born in the U.S.A.”를 부르며 우리 모두가 열망했던 바를 노래한 브루스 스프링스틴: ', 나도 미국인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적어도 모든 것이 문화, 혹은 적어도 팝문화처럼 보였던 그 나라의 일원이었기를 바랐다.

 

모든 것이 찌질하고 소소한 일상뿐이었던 독일과는 달랐다. 그나마 오페라, 연극, 고전 음악이 전부였던 독일 말이다. 우리 쪽에서 헬무트 콜이 국정을 운영할 때, 빌 클린턴은 1992년 대선 선거운동 기간 중 레이밴 웨이페어 선글라스를 끼고 심야 토크쇼에서 색소폰을 연주했다.

 

2017년 오하이오에서 저는 당시 무명 작가였던 J.D. 밴스가 독일인들이 그려온 미국인에 대한 이미지와 사실 전혀 맞지 않는다는 점을 깨달아야 했다. 그는 해병대원처럼 생기지도 않았고, 예일대 졸업생처럼 말하지도 않았으며, 로키 발보아 같은 투사도 아니었다. 그저 동네 쇼핑몰에서 산 양복을 입은 오하이오 출신의 친절하고 푸짐한 체구의 사내였다. 당시 저는 이미 미국에서 수년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린 시절 마음에 각인된 이미지가 실제 삶의 현실과 일치하지 않는 일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그 이미지가 놀라울 정도로 자주 현재의 지각을 압도하며, 눈앞의 미국적 현실과 충돌하거나 심지어 이를 덮어버리곤 했다.

 

트럼프 첫 임기 이후 몇 년 동안은 이러한 낭만주의적 전략으로 어찌 어찌 버텨낼 수 있었다. 대통령을 비난하고 놀려대는 동시에, 미국이라는 아이디어는 곧 과거의 유물이 될 이 대통령보다 훨씬 더 거대하다고 지적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한동안 과거의 인물이 되었다. 덕분에 우리는 우리의 미국관을 재검토해야 하는 상황을 면할 수 있었다. 관념 속의 미국은 강한 회복력을 보여주었다.

 

조 바이든과의 실패한 간주곡(인터메조)를 거쳐 두 번째 트럼프 임기의 절반쯤에 도달한 지금, 이제는 질문을 피하기가 더 어려워졌다. 2024년에 7,730,2508명의 미국인이 그에게 두 번째 임기를 안겨주기를 원했다. 그리고 이제 그 두 번째 임기는 첫 번째보다 훨씬 더 눈에 띄게 세상에 충격파를 보낼 뿐만 아니라, 수많은 독일인 세대에게 열망의 대상이자 좌표가 되어주었던 미국 사회 자체를 개조하려 하고 있다.

 

우리는 여전히 미국을 사랑해도 되는 걸까요, 아니면 스스로를 희화화하고 있는 걸까요? 혹은 깨진 관계에서 늘 대두되는 질문처럼, 모든 것이 오해였고 우리는 내내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던 걸까요? 기반이 되는 본토 미국(Kernamerika)은 처음부터 우리의 친구였던 적이 없었고, 그저 일정 기간 동안 서로 잘 맞았던 것에 불과했을까요?

 

미국은 언제나 관찰자의 눈을 통해, 미리 형성된 내면의 지각에 의해 탄생했다. 때로는 오하이오를 방문했을 때처럼 실제 현실과 충돌하곤 했던 환상에 의해 일부 수식되면서 말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억압 메커니즘을 낳았다. 유럽, 특히 독일의 시선은 미국적 경험(American experience)의 어둡고 불편한 측면들을 외면해야만 했고, 또 외면할 능력이 있었다.

 

부머 세대와 X세대의 이상화된 미국관이 형성되었던 1980년대는, 동시에 정치 외곽에서 들어온 강경파 로널드 레이건의 십년이기도 했다. 서독인들은 오늘날 정치 외곽 출신인 도널드 트럼프를 배척하는 것과 거의 맞먹는 열정으로 레이건을 거부했다. 물론 후자에 대해서는 훨씬 더 타당한 이유가 있지만 말이다. 미국 내에서는 심지어 좌파 리버럴 사이에서도, 레이건을 순진한 전쟁 도발자로 격하한 독일식 유희(“레이건 대신 햇살을(Sonne statt Reagan)" , 퍼싱 미사일 대신 애무를”)를 결코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독일-미국 우호가 시작되던 1950년대 초반에도 이미, 자국 내에서는 매카시 상원의원의 입법 아래 공산주의자들을 탄압하던 국가가 패전국 독일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오늘날 도덕 중심의 독일 외교 정책이라면 분명히 문제 삼았겠지만, 다음 기회에 환영 선물로 축구 유니폼을 가져다주었을 법한 일이다.

 

그리하여 적어도 서독인들은 오늘날 표현으로 일종의 '모호성 내성(Ambiguitätstoleranz)'을 가지고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 우리는 존 포드 감독이나 존 웨인이 출연한, 인디언에 맞서 싸우는 용맹한 투쟁을 그린 할리우드 영화들을 사랑했다. 거대한 학살(Genocide)을 낭만화한 위대한 영화들이었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보며 우리는 나름의 고충이 있었던 노예주들과 함께 눈물을 흘렸고, [지옥의 묵시록]에서는 베트공 위로 네이팜탄 카펫이 깔리는 것을 보면서도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이 적어도 그 배경음악으로 바그너의 [발키리의 기행]을 틀어준 것에 기뻐했다.

 

당시 반제국주의 성향의 미국 회의론자들에게 항상 'BRD'라 불렸던 서독(다른 쪽 독일 국가를 'DDR'이라 줄여 부르는 사람은 'BRD'라고도 불러야 했다)은 미국의 '가장 사랑받는 막내동생'이었다. 비록 중간 중간 힘든 시기를 겪기도 했지만예컨대 1960년대 말 서독이 사춘기에 접어들었을 때, 베를린의 대학생들이 휴버트 험프리 미국 부통령을 향해 푸딩으로 테러를 계획하고, 쿠어퓌르스텐담 거리를 누비며 "--호치민", "아미 고 홈(Ami go home)"을 외친 뒤, 그들의 공유주택(WG)과 코뮌에 돌아와 그레이트풀 데드, 제퍼슨 에어플레인, 카운트리 조 앤 더 피시 같은 지극히 미국적인 뮤지션들의 음악을 들었을 때처럼 말이다. 그리고 우리 독일인들에게는 1960년대 이후부터 스스로가 미국 문화를 점차 수용해 온 것이 사실이지만, 한편으로는 미국인들이 우리에게 이를 강제했다고 볼 수 있는 여지도 충분하다.

 

"정치는 문화의 하류에 있다(Politics is downstream from culture)"라는 신조는 앤드루 브라이트바트(Andrew Breitbart)나 스티브 배넌(Steve Bannon)과 같은 MAGA(Make America Great Again) 인물들에 의해 다시금 정립되었다. 이는 독일의 신우파(Neue Rechte)'메타정치(Metapolitik)'라고 부르는 전략과 동일한 것으로, 문화가 생각을 결정하고, 그 생각이 투표자와 정치를 결정한다는 의미다. 따라서 정치적 변화는 언제나 문화 속에서 준비되거나 터전이 마련되어야 한다. 1930년대 독일인들이 나치 이념에 빠져 미국인의 관점뿐만 아니라 그 누구의 기준에서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사상의 영역으로 탈선한 이후, 미국은 전후 독일인과 관련된 일들을 더 이상 운명에 맡겨두고 싶지 않아 했다.

 

미국은 미군 기지가 서독 사회에 자연스럽게 영향을 미치도록 의도하면서, 미국 문화원(US-Instituts), 하우스, 아카데미 등을 설립했다. 당시 서독의 수도였던 본(Bonn)에는 '미국인 주거지(Amerikanische Siedlung)'까지 존재했는데, 그곳에서는 당시 대형 미국차를 부르던 별칭인 '스트라센크로이처(Straßenkreuzer)'가 작고 네모난 번호판을 단 채 거리 위를 누볐다. 그곳을 방문하려면 먼저 달러를 준비해야 했으며, 다이너(diner)에서 버거와 미국산 원본 콜라를 사 먹고, 시네마(cinema)에서 독일에는 보통 이듬해에야 개봉할 영화를 영어로 감상할 수 있었다. 미군 방송인 AFN은 서독의 주거 지역 깊숙한 곳까지 전파를 쏘아 올리며 한편으로는 록앤롤을,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인들이 독일인을 위해 구상했으나 언뜻 그다지 섹시하게 들리지 않는 개념, '재교육(reeducation)'을 전파했다. 그리고 지금, 몇 세대에 걸친 ()문화적 재교육을 거친 후, 마침내 우리가 미국을 추종하고 이해하게 되어 대다수가 영어를 할 줄 알고, 새로운 시즌의 [유포리아(Euphoria)]를 미국 시청자와 동시에 시청하며, 소셜 미디어를 통해 미국의 담론에 참여할 수 있게 된 지금, 베를린의 베르크하인(Berghain) 클럽 줄 앞에서 매일 밤 수백 명의 겸손해진 미국인들을 만날 수 있고, 택시나 '슈페티(Späti, 늦게까지 하는 구멍가게)'로 위장한 우체국, 배달 서비스 등 사회 곳곳에서 이곳 출신이 아닌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는 다문화 사회가 된 지금, 지난 70년간 우리가 '아메리칸 익스피리언스(American experience)'라고 여겨왔던 모습에 수많은 삶의 영역이 가까워진 바로 지금, 정작 미국 자체는 더 이상 예전의 모습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미국이라는 국가 시스템은 도널드 트럼프와 당시엔 무명 작가였던 JD 밴스의 주도 하에, 미국 유권자 과반수의 정통성을 얻어 자신들의 팝문화가 만들어낸 시그니처와도 같은 상징들을 등지고 있다. , 전 세계가 '아메리칸 익스피리언스'를 손으로 잡고 느낄 수 있게 해준 거의 모든 것에 반기를 들기 시작한 것이다. 자신의 행운을 찾기 위해 다른 곳에서 이 나라로 찾아와 결실을 맺고, 이후 아메리칸 익스피리언스의 불가결한 일부가 된 사람들, 지난 수십 년간 소설과 그림을 통해 미국의 감성을 세계에 퍼뜨린 할리우드의 영화 제작자와 스타들, 예술가와 작가들, 테일러 스위프트, 비욘세, 브루스 스프링스틴, 그리고 최근에는 전 세계가 지켜보는 미국 고유의 대형 이벤트인 슈퍼볼과 그 하프타임 쇼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20세기 후반의 '옛 미국'은 현재 미국 본토보다는 유럽과 독일이라는 디아스포라(Diaspora) 속에서, 그리고 소설가 브렛 이스턴 엘리스(Bret Easton Ellis)가 문화적 패권의 시기라 칭했던 미국의 '제국 시절'을 직접 겪을 만큼 나이가 든 밀레니얼, X세대, 베이비 부머들의 관념과 기억 속에 더 깊이 살아 숨 쉬고 있다. 미국 문화의 생산물들이 독일인의 의식 속에 남긴 흔적은 아직까지는 미국의 정치적 방향 전환을 덮어버릴 만큼 강렬해 보인다. 하지만 어쩌면 이 나라는 수많은 독일인이 사랑하게 되었던 그 예전의 모습으로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다. 이미 최소 10년 전부터 그 모습이 아니었다. 현 정부가 사라지면 우리 기억 속의 미국이 돌아올 것이라는 기대는 실현되지 않을 것이다.

 

이제 우리의 애정은 보다 암묵적이고 수면 아래로 숨어들어야만 한다. 공식적인 답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헤어진 전 연인이 남기고 간 물건들을 차마 버리지 못해 몇 년 동안 계속 발견하는 상황과 같아질까? '이제 나 혼자서도 잘 살아야지, 회복탄력성(resilient)을 가져야지'라고 다짐하면서도, 인스타그램으로 그녀가 어떻게 사는지 내내 몰래 들여다보는 그런 상황 말이다.

 

2021, 몇 시간 동안의 끔찍하고 아무런 결론도 내지 못한 조사를 마치고 공항 지하실에서 다시 지상으로 풀려났을 때, 모든 것은 여느 때와 다름없었다. 남캘리포니아의 태양은 막 태평양 너머로 사라지고 있었고, 공기는 야자수 잎을 간지럽히며 따스하게 산들거렸다. 렌터카 승차장으로 향하는 낡은 셔틀버스 안에서는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의 노래가 흘러나왔고, 운전기사는 코로나 마스크 너머로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었다. "R-E-S-P-E-C-T, find out what it means to me..." 차에서 내릴 때 그녀는 내 얼굴을 보고 싶다며 마스크를 잠시 벗어달라고 부탁했다. 요구대로 하자 우리는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차를 받아 들고 할리우드 방향 I-405 도로의 빽빽한 교통 흐름 속으로 합류할 때, 사이드 미러에 적힌 익숙한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거울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에 있음(Objects in the mirror are closer than they appear)." 나는 미국에 와 있었다.

----------

 

* 출처: [Der Spiegel(쉬피겔)] (2026.7.3.)